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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 / 김석야 작사 김호길 작곡 최희준 노래
1.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2.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하숙생' 천안노래비 제막식 및 천안문화원 개원 47주년 기념식 200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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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 노래비 |
천안문화원은(원장 민병달)은 최희준이 불러 아직까지 애창되고 있는 '하숙생'의 노랫말이 천안시 입장면 출신 故김석야 선생이 천안삼거리를 배경으로 작사했음이 밝혀지면서, 천안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고자 천안 삼거리공원에 '하숙생' 천안노래비 제막식을 갖는다.
일 시 : 2001년 7월 7일 오전 10시30분 장 소 : 천안삼거리공원 내 용 : 천안문화원 47주년 기념식 '하숙생'천안노래비 제막식 문 의 : 천안문화원(041)575-3004
기사들은 <하숙생>노래비가 선생의 생전에 계획되다가 작고한 이듬해에 제막이 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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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야 선생이 방송에 발을 들여놓을 무렵의 기록을 노정팔 저 <한국 방송과 50년>"에서 인용한다.
"1950년대 후반은 방송의 부흥기였다. 라디오에 꽃을 피우기 위해 조석으로 물을 주고 일으켜 세우며 가꾸어 준 분이 바로 오재경(吳在璟)실장이다. 그는 1956년 7월 갈홍기(葛弘基)실장의 후임으로 공보실에 부임했다. (중략) 새로 부임해 온 오재경 공보실장은 방송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크게 달라진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마침 이때 <한국일보>와 <신태양>지에 날카로운 방송 평을 쓰는 사람들이 있어 만나 봤다. 그들은 방송에 깊은 관심과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정순일(鄭淳日), 김석야(金石野)씨 두 사람이었다. 그들을 그냥 방송국 밖에 둘 것이 아니라 아예 끌어들여 방송의 아이디어 집단으로 만들자고 구상한 것이 「방송문화 연구실」이었다. (중략) 처음에는 소공동 중앙공보관 위층에서 김석야씨 정순일씨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얼마 후 김석야씨가 중앙방송국 편성계장으로 발탁되어 가고, 「방송문화 연구실」진용이 강화되면서 정동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여기 실장에는 <한국일보> 문화부장을 지내던 한운사씨가 기용되었다. (하락) "
내가 데뷔하여 처음 KBS를 방문했을 때 선생은 편성계장이었지만 직접 접촉한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꿈은 사라지고> <사랑은 흘러도> <외나무 다리>등 연속을 연이어 발표하는 것을 보고 한편 의아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전업작가가 아닌 방송국 직원이 드라마 그것도 단막이 아닌 연속극을 쓴다는 것이 수긍이 가지 않았다. 많은 현상금을 걸고 신인작가들을 모집해 놓고 그들에게 단편이나 쓰게하고 그런 우대(?)를 하다니.. 신인작가들이 불평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신인들은 으레 건전한 주제에 대사 한마디에도 조심하는 때였는데 허무하게 꿈이 사라진다 거니, 사랑이 흘러갔다 거니 외나무다리 있는 고장에서 감상(感傷)에 젖어 있다니.. 그러나 나는 내가 고지식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직원신분으로 작품을 쓰는 일은 그 후에도 공영에서나 민방에서나 묵인되고 있었다. 기실 그들은 초창기의 한국방송을 이끌어 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후에 인기작가로 도약해 방송국을 그만두고 각 방송에서 수많은 연속극들을 양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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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호적으로는 나보다 한살 위지만 우리 나이로는 뱀띠 동갑이다. 같은 뱀띠이면서도 무척 대조적이라고 평소 생각했었다. 선생이 양지의 뱀이라면 나는 음지의 뱀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12월 생이다) 선생은 적극적이고 추진력이 강했다. 나는 소극적이고 소심한 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선생을 부러워하기도 했고 한편 저항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선생은 정치적이었다. JP가 정계에 나타나면서 선생과 밀착해 있었다. 그 덕(?)에 초창기 우리 극작가 단체는 <제1회 백제문화제>에 초청되어 부여에도 가고 <워커힐>이 섰을 때 초청되기도 했으며 산업시찰도 다니고 그랬다. 선생은 자민련에 가입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이 되기도 했다. 작가 출신이니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도 했는데 그 일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타계하게 되니 애석한 일이다. 언젠가 천안에 가는 기회가 있으면 노래비를 찾아볼 참이다. 선생은 가셨지만 노래는 남아 후대에까지 전해질 것이니 같은 작가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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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 1929년 충남 천원 출생 - 서울중앙방송국 편성계장 -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연속극 ‘서울의 뒷골목’ - ‘꿈은 사라지고’ - ‘사랑은 흘러도’ - ‘하숙생’ - ‘내 주먹을 사라’ - ‘명동 아줌마’ 외 다수 - 2000년 10월 1일 별세 향년 71세
최희준과 하숙생
신성일·김지미 주연의 영화 '하숙생'(1966). 한 남자가 애인에게 복수하는 집념을 다룬 이 영화에서 최희준은 주제가로 큰 인기를 얻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맨발의 청춘' '하숙생' '종점'…. 1960년대 중반 내가 주인공으로 히트한 영화이면서 가수 최희준이 주제가를 불러 더욱 빛난 작품들이다. 최희준은 나와 한 시대를 풍미한 단짝이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최희준은 미8군에서 냇 킹 콜 노래를 불러 가수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팝송의 정통파였다. 그가 속한 포클로버스(최희준·박형준·위키 리·유주용)는 각자 스타일에 맞는 편곡 실력을 갖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64년 '맨발의 청춘' 이후 나와 최희준은 신정·구정·추석 등 명절마다 지방 극장에 쇼 행사를 함께 다녔다. 내가 무대에서 팬들에게 인사했고, 그는 '맨발의 청춘' 주제가와 다른 곡을 추가로 불렀다. 착한 성격을 가진 그는 얼굴에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정감 넘치는 인물이었다. 어디든 그와 함께 있으면 편했다.
지방 쇼 행사에선 밥 먹는 시간이 일정치 않다. 최희준은 대기실에서 틈을 봐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그의 얼굴은 둥글넙적하다. 그 앞으로 막 배달온 자장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 광경을 보던 사회자 김정남은 "금방 쪄낸 찐빵같다"며 웃곤 했다. 그래서 최희준에게 붙여진 별명이 '찐빵'이다.
영화배우 4총사인 나와 신영균·윤일봉·남궁원은 최희준의 '나는 곰이다'라는 노래 때문에 각자 별명을 얻게 됐다. '와하하하 나는 곰이다 / 미련하다 못났다 놀려도 좋다 / 재주는 없다마는 할 짓은 다한다…'라는 가사는 듣기만 해도 웃긴다. 어느 날 우리 네 명이 회식할 때 이 노래가 회자됐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세 선배의 별명을 지었다. 신영균에겐 '곰'. 그는 그 별명을 듣더니 노랫말처럼 "와하하하"하고 웃었다. 윤일봉에겐 '윤코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코가 컸기 때문에 적격인 별명이 됐다.
남궁원은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다소 우유부단한 성격이다. 나는 그를 '순두부'라 불렀다. 바로 내 차례였다. 윤일봉은 "성일이는 말마다 콕콕 쏘니까 '꼬챙이'가 좋겠어"라고 말했다. 내 별명은 그 길로 '꼬챙이'가 됐다.
60년대 최대 히트곡 중 하나는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 주제가였다. '인생은 나그네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 듯 / 정처없이 흘러서간다 / 인생은 벌거숭이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 듯 /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관객은 최희준의 애절한 노래와 기 막힌 영화 스토리에 빠져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코디언 악사 역을, 김지미는 그의 애인 역을 맡았다. 두 사람은 대단히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화재 사고로 인해 남자가 추남이 되자 여자는 애인을 떠난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남자는 성형을 한 후 정체를 감추고 여자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집 근처에 하숙생으로 들어간다. 그는 밤마다 연애 시절 여자에게 들려주던 아코디언 곡을 구슬프게 연주한다. 그 곡 중 하나가 '인생은 나그네길…'이다. 처절한 심리전이다. 여자는 매일 밤 마을에 울려퍼지는 그 곡을 들으며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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