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선생님의 일화
1. 城谷의 神童 선생은 어릴 적부터 남달리 기억력과 이해력이 뛰어나 가끔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동(神童)이라고 불렀으며, 선생의 집은 '신동집'으로 통했다.
어느날 선생이 서당에서 <대학 大學>을 읽으면서 책의 군데군데 시커멓게 먹칠을 하고 있었다. 이상이 생각한 훈장(訓長)이 그 까닭을 물으니, "정자(程子)의 주(註)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아홉 살 때에 <서전 書傳>을 읽고 기삼백주(朞三百註)를 자해(自解) 통달했다고 하는 천재였지만, 훈장은 또 한번 놀랐다.
2. 비녀가 소용없다. 선생은 1912년을 전후하여 장단(長湍)의 화장사에서 <여자단발론 女子斷髮論>을 썼다. 당시 남자들에 대한 <단발론>이 사회적 물의를 크게 자아내고 있을 때 감히 여자의 단발을 부르짖은 것은 선생의 선각적인 일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원고는 지금 전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그 무렵 선생은 "앞으로 20년쯤 후가 되면 비녀가 소용없게 된다."고 예측하였으며 좋은 금비녀를 꽂고 있는 부인을 보면, "앞으로 저런 것은 소용없게 될텐데...."하였다는 것이다.
3. 어서 덤벼 봐라 선생이 고성(高城) 건봉사에 계실 때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술에 취한 그 지방의 어떤 부자를 만났다. "이놈, 중놈이 감히 인사도 안 하고 가느냐?" 하고 지나쳐 가려는 선생을 가로막고 시비를 걸었다. 선생은 못들은 척하고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자, 그 부자는 따라와서 덤벼들었다. 선생이 한번 세게 밀었더니 그는 뒤로 나동그라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선생이 절로 돌아온 얼마 후 수십 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놈들 어서 덤벼 봐라. 못된 버릇을 고쳐주겠다."하고 드디어 화가 난 선생은 장삼을 걷어붙이고 힘으로써 대결하였다. 치고 받고 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자그마한 체구였으나 어릴 때부터 남달리 힘이 세었던 선생을 당하는 사람이 없어 하나둘씩 꽁무니를 뺐다. 강석주 스님은 선학원 시절의 선생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선생은 기운이 참 좋으셨습니다. 소두(小斗) 말을 놓고 그 위를 가부좌(跏趺坐)를 한 채 뛰어넘을 정도였으니까요. 팔씨름을 하면 젊은 사람들도 당하지 못했지요."
선생은 심우장에서 종종 선학원을 찾아갔는데 혜화동을 거치는 평지길을 택하지 않고 삼청동 뒷산을 넘어 다니셨다. 이 때 선생을 따르던 저는 당시의 일이 이렇게 생각난다. "삼청동 뒷산을 넘을 때 선생은 어찌나 기운이 좋고 걸음이 빠른지 새파란 청년 이였던 제가 혼이 났었지요. 그저 기운이 펄펄 넘쳤어요. 선생은 보통 걸음으로 가시는데 저는 달음박질을 해도 따라가지를 못했어요."
또 조명기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만해 선생은 힘이 셀 뿐 아니라 차력을 하신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요. 왜경이 뒤쫓을 때 어느 담모퉁이 까지 가서는 어느 틈에 한길도 더 되는 담을 훌쩍 뛰어넘어 뒤쫓던 왜경을 당황케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커다란 황소가 뿔을 마주대고 싸울 때 맨손으로 달려들어 두 소를 떼어놓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지요." 아무튼 선생은 남다른 역사(力士)이기도 했다.
4. 痲醉하지 않은 채 받은 手術 선생이 만주 땅 간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떤 고개를 넘다가 두서너 괴한들이 쏜 총탄을 목에 맞고 쓰러졌다. 피가 심하게 흘러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환상으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다. 하얀 옷을 입고 꽃을 든 아름답기 그지없는 미인의 모습인데, 미소를 던지면서 그 꽃을 선생에게 주면서 "생명이 경각에 있는데 어찌 이대로 가만히 있느냐"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려 중국 사람의 마을을 찾아가서 우선 응급치료를 받고 곧 한국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의사는 큰 상처여서 매우 아플 테니 마취를 하고 수술하자고 했으나 선생이 굳이 마다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마취를 하지 않았다. 생뼈를 깎아내는 소리가 빠각빠각 날 뿐 아니라 몹시 아플텐데도 까딱 않고 수술이 끝날 때까지 견뎌냈다. 의사는 "그는 인간이 아니고 활불(活佛)이다"고 감탄하며 치료비도 받지 않았다 한다.
5. 네 郡守지, 내 군수냐 선생이 백담사에서 참선에 깊이 잠겨 있을 때 군수가 이곳을 찾아왔다. 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서 영접을 하였으나 선생만은 까딱 않고 앉아 있을 뿐 내다보지도 않았다. 군수는 매우 괘씸하게 생각하여, 저기 혼자 앉아 있는 놈은 도대체 뭐기에 저렇게 거만한가!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선생은 이 말을 듣자마자 "왜 욕을 하느냐?"고 대들었다. 군수는 더 화가 나서, 뭐라고 이 놈! 넌 도대체 누구냐?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선생은 "난 한용운이다."하고 대답했다.
군수는 더욱 핏대를 올려 "한용운은 군수를 모르는가!"하고 말하자, 선생은 더욱 노하여 큰 목소리로 , "군수는 네 군수지, 내 군수는 아니다."라고 외쳤다. 기지(機智)가 넘치면서도 위엄 있는 이 말은 군수로 하여금 찍 소리도 못하게 하였다.
6. 僧侶娶妻論의 辯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발표했을 때 이중에 들어있는 승려취처론에 대한 시비가 벌어졌다. 이 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당면 문제보다도 30년 이후를 예견한 주장이다. 앞으로 인류는 발전하고 세계는 변천하여 많은 종교가 혁신될텐데 우리의 불교가 구태의연하면 그 서열에서 뒤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금제(禁制)를 할수록 승려의 파계와 범죄는 속출하여 도리어 기강이 문란해질 것이 아닌가. 후세 사람들은 나의 말을 옳다고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한 나라로서 제대로 행세를 하려면 적어도 인구는 1억쯤은 되어야 한다. 인구가 많을수록 먹고 사는 방도가 생기는 법이다. 우리 인구가 일본보다 적은 것도 수모(受侮)의 하나이니 우리 민족은 장래에는 1억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
7. 月南 李商在와의 訣別 3·1운동을 준비할 때, 선생은 이 독립운동을 조직화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호응을 가장 널리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종교단체와 손을 잡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기독교 측의 이상재 선생을 만나서 대사를 의논하였다. 이 자리에서 월남은 "독립선언을 하지 말고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무저항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유리하오."라고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선생은 "조선의 독립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요, 침략주의에 대한 약소 민족의 해방투쟁인 만큼 청원에 의한 타력본위가 아니라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행동으로 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하고 주장했다. 이같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선생은 월남과 정면 충돌하였기 때문에, 월남을 지지하는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선생의 의견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생은 " 월남이 가담했더라면 3·1운동에 호응하여 서명하는 인사가 더욱 많았겠지만..... 죽음을 초월한 용맹이 극히 귀하다."고 한탄했다. 서명서에 기명 날인이 잘되면 백 명 이상은 되리라던 예측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8. 죽기 참 힘든 게로군 선생은 3·1운동의 준비 공작을 서두르는 동안 여러 인사를 만났다.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들을 차례로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대개는 회피하고 적극적인 언질을 피하였다. 서울의 소위 양반 귀족들은 모두가 개인주의자요, 국가 민족을 도외시한다고 한탄하며 "죽기 함 힘든 게로군!"하고 말했다.
9. 당신을 그대로 둘 수 없다 선생은 최린의 소개로 천도교 교주 의암 손병희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이 때 의암은 조선 갑부 민영휘, 백인기, 그리고 고종 못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제일 먼저 자가용 자동차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3·1운동에 천도교 측이 호응해 주기를 요구했더니 먼저 이상재는 승낙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손 선생께서 이상재 선생의 뜻으로만 움직입니까? 그러면 이 선생이 반대하니 선생도 그를 따르렵니까?
그러나 이미 대사가 모의되었으니 만일 호응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당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하고 힘의 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말을 하였다.이 말에 적이 놀란 의암은 자기를 총 대표로 내세우는 조건으로 서명을 승낙했다. 의암의 이 승낙으로 천도교의 여러 인사들은 의암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10.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기미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 중 김병조,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네 사람을 제외한 29인이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너무 심하여 선언서를 낭독할 겨를 조차 없었다. 부득이 선언서의 낭독을 생략하여 연설로 대신하고 축배를 들게 되었다. 최린의 권고로 만해 선생이 앞에 나서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 선언 연설을 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간단하고 짧은 연설이지만 선생은 하고 싶은 말을 다한 셈이었다.
11. 가짜 권총 3·1운동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선생은 당대의 거부 민영휘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므로 선생은 권총을 끄집어내었다. 민영휘는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돕겠노라고 맹세했다. 이 때 선생은 힘있게 쥐었던 그 권총을 그의 앞에 내놓았다. 이 권총은 다름 아닌 장난감 권총이었다. 탐정 소설에나 나오는 듯한 흥미 있는 이야기지만 선생의 이런 수단은 오직 독립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취해진 비장한 행위였다.
민영휘는 맹세한 터라 "비밀리에 모든 협조를 하겠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주겠소. 그러나 이후부터는 다시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들 형식과 상의하여 일을 추진시켜 주기 바라오. 부기 성공을 비오."라는 간곡한 뜻을 말했다. 민형식은 이 일이 있은 후 선생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 되어 물심양면으로 조선 독립을 도왔고, 선생이 별세했을 때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12. 郭鍾錫과 萬海 만해 선생은 3·1운동을 계획하면서 독립선언 서명자 가운데에 유림(儒林)출신의 인사가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는 것을 개탄했다. 서울에는 유림 지도자들이 있으나 거의 친일에 기울어져서 경남 거창에 사는 대유학자 면우 곽종석 선생을 찾아갔다. 만해 선생은 면우 선생에게 먼저 세계 정세를 알리고 독립운동의 참가 여부를 물으니 즉석에서 협조할 것을 쾌락하고 곧 가사를 정리한 뒤에 서울에 올라가 서명하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면우 선생은 공교롭게도 독립선언을 며칠 앞두고 급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자기 인장을 갖고 만해 선생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13. 獄中에서의 大喝 3·1운동으로 투옥되어 있을 때, 최린은 일본이 우리 나라 사람을 차별 대우할 뿐만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는 말들을 하며 총독 정치를 비판했다. 이 때 묵묵히 듣고 있던 선생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니, 그럼 고우(古友)는 총독이 정치를 잘한다면 독립 운동을 안 하겠다는 말이오!"라고 하였다.
14. 監房의 汚物 민족 대표들은 모두 감방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이렇게 갇혀 있다가 그대로 죽음을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속으로 이러한 불안을 안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극형에 처한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선생은 태연자약 하였으나 이런 얘기를 전해들은 몇몇 인사들은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은 격분하여 감방 안에 있는 똥통을 뒤엎어 그들에게 뿌리고, "이 비겁한 인간들아, 울기는 왜 우느냐. 나라 잃고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이것이 소위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는 민족 대표의 모습이냐? 그 따위 추태를 부리려거든 당장에 위소해 버려라!"라고 호통을 치니,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15. 日本은 敗亡한다 독립 선언 서명자들이 이 법정에서 차례로 신문을 받을 때, 선생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재판관이 "왜 말이 없는가?"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재판관을 꾸짖었다.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 운동을 하는 것은 백 번 말해 마땅한 노릇. 그런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 신문이 계속되자, 선생은 "할말이 많으니 차라리 서면으로 하겠다."고 지필을 달래서 옥중에서 장문의 <조선독립의 서>를 썼다.
여기에서 선생은 조선 독립의 이유, 독립의 자신, 독립의 동기, 민족의 자유 등에 대한 이론을 전개하고 총독정치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결심공판이 끝나고 절차에 따라 최후 진술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선생은 "우리들은 우리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 것뿐이다.
정치란 것은 덕에 있고 험함에 있지 않다. 옛날 위나라의 무후가 오기란 명장과 함께 배를 타고 강을 내려오는 중에 부국과 강병을 자랑하다가 좌우 산천을 돌아보면서 "아름답다 산하의 견고함이여, 위국의 보배로다"하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오기는 이 말을 듣고 "그대의 할 일은 덕에 있지,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적이 되리다"고 한 말과 같이, 너희들도 강병만을 자랑하고 수덕을 정치의 요체로 하지 않으면 국제사회에서 고립하여 마침내는 패망할 것을 일러두노라."라고 말했다. 과연 선생의 말씀대로 일본은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쫓겨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예견했던 선생은 끝내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바로 그 전해에 별세하였다.
16. 마중받는 인간이 되라 선생이 3·1운동으로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던 날, 많은 인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 선언 서명을 거부한 사람이요, 또 서명을 하고도 일제의 총칼이 무서워 몸을 숨겼던 사람들이었다. 선생은 이들이 내미는 손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직 얼굴들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들에게 침을 탁탁 뱉었다. 그리고는 "그대들은 남을 마중할 줄은 아는 모양인데 왜 남에게 마중을 받을 줄은 모르는 인간들인가."라고 꾸짖었다.
17. 鐵窓 哲學 선생이 3·1운동으로 3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약 1개월 뒤, 조선불교청년회의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강연회가 열렸다. 이때의 연제는 '철창철학'이었는데 강연회장은 초만원을 이루었다. 일제의 임검으로 온 경관은 미와란 일본 형사였다. 연설이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해산 명령은 물론이며, 현장에서 연사를 포박해가는 때였으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선생은 임검에 거슬리지 않게 하면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
약 2시간동안 이나 연설을 하였는데 맨 마지막에는 비장한 어조로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 먼지는 씻어도 의암에 서려 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오래 계속되었으며, 이 일본 경찰관까지 박수를 쳤다고 한다.
18. 島山과 萬海 만해 선생이 도산 안창호 선생과 나라의 장래를 의논한 일이 있다. 이 때 도산은 우리가 독립을 하면, 나라의 정권은 서북 사람들이 맡아야 하며, 기호 사람들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만해 선생이 그 이유를 물으니, 도산 선생은 기호 사람들이 오백년 동안 정권을 잡고 일을 잘못했으니 그 죄가 크며, 서북 사람들은 오백년 동안 박대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한다. 그후부터 만해 선생은 도산 선생과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19. 인도에도 김윤식이 있었구나 3·1운동이 일어난 얼마 뒤 운양 김윤식이 그전에 일제가 준 남작의 작위를 반납한 일이 있다. 이것은 독립 운동의 여운이 감도는 당시에 취해진 민족적인 반성이었다. 이 일이 있은 몇 달 뒤 인도에서는 우발적인 일치랄까, 우리 나라를 동방의 등촉이라고 노래한 바 있는 시인 타고르가 영국에서 받았던 작위를 반납하였다. 이것은 간디의 무저항주의적인 반영 운동의 자극을 받은 때문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인도에도 김윤식이 있었구나"하는 묘한 비판을 하였다.
20. 神이여, 自由를 받아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저명 인사들의 강연회를 열었을 때, 선생은 마지막으로 자유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여러분, 만반진수를 잡수신 후에 비지찌개를 드시는 격으로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아까 동대문 밖을 지날 때 과수원을 보니 가지를 모두 가위로 잘라 놓았는데 아무리 무정물 이라도 대단히 보기 싫고 그 무엇이 그리웠습니다"하는 비유를 들어 부자유의 뜻을 말하자, 청중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부자유를 과수원의 가지 잘린 나뭇가지에 비유한 것은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자유를 빼앗긴 것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입회형사는 그 뜻을 모르고 박수를 하는 청중들에게, 고작 과수원 전정(剪定) 이야기인데 박수를 하느냐고 청중의 한 사람에게 따졌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재치 있게도, "낸들 알겠어요. 남들이 박수를 하니 나도 따라 쳤을 뿐이지요"라고 임기응변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잠시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선생은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하고 자유를 구걸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또 존재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 신도 부자유하고 신이 부자유할 때 사람도 부자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가 자유를 지켜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하고 나아가야 합니다"하고 열을 뿜었다. "신이여, 자유를 받아라"하는 이 말을 그때 참석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21. 自 助 1923년 조선민립대학 기성회의 선전 강연회가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렸다. 만원을 이룬 가운데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로 유성준 선생의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 취지에 대하여' 라는 열변에 이어 만해 선생은 '자조'라는 연제로 불을 뿜는 듯한 열변을 토했다. 말끝마다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선생의 독특한 웅변은 청중들을 열광케 했다.
22. 우리의 가장 큰 원수 선생은 웅변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말이 유창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목소리 또한 맑고 힘찼다. 그리고 선생이 강연을 하게 되면 으레 일제의 형사들이 임석 하게 되었는데 어찌나 청중들을 매혹시키는지 그들조차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소련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미국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자문 자답식 강연에, 임석 했던 형사들은 차차 상기되기 시작했다. 더구나 청중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일본일까요? 남들은 모두들 일본이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합디다" 선생의 능수 능란한 강연은 이렇게 발전해 갔다. 임석 형사가 눈에 쌍심지를 켠 것은 바로 이때다. "중지! 연설중지!" 그러나 선생은 아랑곳없이 어느새 말을 다른 각도로 돌려놓고 있었다.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소련도 아니요, 미국도 아닙니다. 물론 일본도 아닙니다.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라는 말입니다. "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청중들은 박수갈채를 했다. 이쯤 되니 일제 경찰들도 더 손을 못 대고 머리만 긁을 뿐이었다.
23. 昭和를 燒火하다 선생이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있을 때 공문을 전국에 돌려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해 온 봉투의 뒷면에는 일본 연호인 소화 몇 년 몇 날이란 글자가 찍혀있었다. 이것을 본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천 여장이나 되는 그 봉투들을 아궁이 속에 처넣어 태워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생은 가슴이 후련한 듯 "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시원하군!"하는 한마디를 던지고는 훌훌 사무실을 떠나버렸다.
24. 나를 埋藏시켜라 선생은 젊은이들을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기대를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젊은 후진들이 선생 자신보다 한 걸음 앞장서 전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공부도 더 많이 하고 일도 더 많이 하여 선생 자신과 같은 존재는 오히려 빛이 나지 않을 정도로 되기를 바랐었다.
그러므로, 소심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들을 보면 심히 못마땅해했다. 더구나 술을 한잔 하여 얼큰히 취하면 괄괄한 성격에 불이 붙어, 젊은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봐. 나 같은 존재는 독립 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해봐!"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이가 있으면 선생은 오히려 축하한다고 격려하였다.
25. 펜촉이 부러지다 1927년 월남 이상재 선생의 사회장 때였다. 선생은 장의위원 명부에 선생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음을 알고 수표동에 있는 장의위원회를 찾아가 자기의 이름 석자를 펜으로 박박 그어 지워 버렸다. 펜에 얼마나 힘을 주어 그었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종이가 찢어졌다. 이것은 3·1운동 당시 월남이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26. 어디 한번 더 해봐 어느 날 재동에 있는 이백강 선생 댁에서 조촐한 술좌석이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김적음 스님을 비롯하여 몇몇 가까운 분이 동석하고 있었다. 술이 몇 차례 도니 만해 선생도 모처럼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잔이 거듭 오고가던 중 김적음 스님이 "여러분 감빠이(乾盃)합시다"라고 말하였다. 선생은 노발하여 "적음, 그 말이 무슨 말인가? 무엇을 하자고? 어디 한번 더해봐."하고 언성을 높였다. 적음 스님은 무색했다.
27. 維 新 선생은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유사지추(有事之秋:독립의뜻)를 당하면 조선의 중부터 제도하고 불교 유신을 하여 나라를 빛내겠다."
28. 北向집 尋牛莊 줄곧 빈한한 생활을 해오던 선생은 만년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 한 칸을 갖게 되었다. 마음놓고 기거할 집 한 칸 없는 선생의 생활을 보다 못해 방응모, 박광, 홍순필, 김병호, 벽산스님, 윤상태 등을 비롯한 몇몇 유지들이 마련해 준 집이었다.그런데 이 집을 지을 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집터를 잡자고 했으나 선생은 "그건 안 되지. 남향하면 바로 돌집(조선총독부)을 바라보는게 될 터이니 차라리 볕이 좀 덜 들고 여름에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어." 해며 동북향집을 짓게 했다.
보기 싫은 총독부 청사를 자나 깨나 향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선생에게는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동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집을 세웠는데, 이 집이 바로 선생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몸 담으셨던 심우장이었다. 선생이 손수 지은 이 택호는 소를 찾는다는 뜻인데 소는 마음에 비유한 것이므로 무상대도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선생은 별세하는 날까지 이 집에서 사상을 심화시키고 선(扇)을 깨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이 심우장의 맞은편에 궁궐같은 일본의 대사관저 가 세워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야릇한 일이다.
29. 放聲大哭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가 왜적에 검거되어 그후 마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애국지사 일송 김동삼 선생이 별세하고 말았다. 만해 선생은 자진하여 유해를 인수해서 심우장의 자기 방에다 모셔다 놓고 오일장을 지냈다. 장례 때에는 사상가를 중심으로 한 많은 명사가 조의를 표하기 위하여 왔으나 꼭 오리라고 믿었던 모모 인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그 까닭을 물으니 선생은 "그 삶들이 사람 볼 줄 아는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홍제동 화장터는 일본인 경영이므로 미아리의 조그만 한국인 경영의 화장터에서 장례를 치렀다. 영결식에서 선생은 방성대곡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 민족 지도자의 유일무이한 위인인 일송 선생의 영결은 민족의 대불행이라, 2천2백만 겨레를 잃는 것처럼 애석한 일이다. 국내 해외를 통하여 이런 인물이 없다. 유사지추를 당하여 나라를 수습할 인물이 다시 없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비통하다."
여기서 말하는 '유사지추'란 말할 것도 없이 독립을 말하는 것이며, 선생은 독립 후 건국의 대업을 생각하고 더욱 일송의 죽음을 애통해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선생이 우는 것을 그때 꼭 한번 보았다고 한다.
30. 곰과 獅子 1937년 2월26일 총독부 회의실에서 총독부에서 주관한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렸다. 이것은 조선 불교를 친일화 시키려는 목적에서 계획된 것이었다. 여기에 참석한 마곡사 주지 송만공 선사는 명웅변을 벌임으로써 이 회의를 주재하는 총독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과거에는 시골 승려들이 서울엔 들어서지도 못했으며, 만일 몰래 들어왔다가 들키면 볼기를 맞았다. 그때는 이같이 규율이 엄하였는데 이제는 총독실 까지 들어오게 되었으니 나는 도리어 볼기 맞던 그 시절이 그립다. 우리들이 여기에 오게 된 것은 사내정의(초대총독)가 이른바 사찰령을 내려 승려의 규율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전이 가르치는 것과 같이 사내정의는 무간 지옥에 갔느니라. 따라서 남총독 역시 무간 지옥에 갈 것이다" 그러고는 "총독은 부디 우리 불교만은 간섭하지 말고 우리에게 맡겨 달라"고 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당시 위세를 떨치던 총독을 바로 앞에 놓고, 송만공 선사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책상을 치기까지 하면서 총독은 무간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호통을 치는 장면은 참으로 얼마나 통쾌하고 장엄 했을까? 물론 장내는 초긴장이 되었으며, 이제 총독으로부터 무슨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만공 선사를 미친 늙은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이 때 총독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만공 선사를 체포하려고 하는 헌병들을 만류하였다고 한다.
회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수선하게 끝났으나 예정했던 대로 총독은 참석자 전원을 총독 관저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만공 선사는 총독 관저로 가지 않고 선학원으로 만해 선생을 만 나러 갔다. 총독을 호되게 꾸짖은 이 통쾌한 이야기는 금방 장안에 퍼졌다. 이미 이 사실을 들은 만해 선생은 만공 선사가 찾아온 것이 더욱 반가웠다. 이윽고 곡차를 놓고 마주앉아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만해 선생은 말했다.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이 가지신 주장으로 한 대 갈길 것이지." 만공 선사는 이 말을 받아 넘겼다.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는 법이지." 그러고 보니, 만공 선사는 사자가 되고 만해 선생은 곰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만해 선생은 즉각 응대하였다.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큰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즉 만공 선사는 새끼 사자가 되고 만해 선생은 큰 사자가 되어 버린 셈이다. 당대의 고승인이 두 분이 주고 받은 격조 높은 이 대화는 길이 남을 만한 역사적인 일화일 것이다. 훗날 만해 선생이 돌아가신 후 만공 선사는 이제 서울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다시는 서울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31. 나의 죽음으로 獨立이 된다면 선생은 어쩌다 술을 들어 거나하게 취하면 흥분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잘 했다. "만일 내가 단두대에 나감으로 해서 나라가 독립된다면 추호도 주저하지 않겠다."
32. 親友를 아끼는 마음 선생은 친구인 화가 일주 김진우가 친일요녀 배정자의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집을 찾아갔다. 배정자가 나와 반가이 맞아들였으나 선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따라 들어가 일주가 정말 기숙하고 있는가를 살폈다. 마침 그가 있었으나 선생은 일주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배정자가 술상을 차려 들고 들어와서 술을 따라서 선생에게 권하였다. 선생은 그때서야 낯빛을 고치고 일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술상을 번쩍 들어 일주를 향하여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태연히,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나왔다. 그것이 친구인 일주를 책망하는 동시에, 평소에 아끼던 마음에서 우러나 행동이었다. 그 후 선생이 별세하였을 때, 일주는 통곡하며 끝까지 호상하여 누구보다도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33. 强直과 排日 어느 해, 삼남 지방에 심한 수해가 났다. 학생들은 수재민을 돕기 위하여 모금 운동에 앞장 섰다. 그들이 선생을 방문하니, "제군들, 정말 훌륭한 일을 하는군!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우리 민족이 함께 일어나서 서로 도와야지." 하며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서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런데 모은 돈은 어떻게 쓰나?"
선생은 돈이 어떻게 유용하게 쓰이는지 궁금하여 물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일부는 국방비로 헌납하고 그 나머지는 수재민에게 나누어 줍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선생의 태도는 바뀌었다. "무어! 왜놈의 국방비로 헌납해 안 되지, 내가 왜놈들의 국방비를 보태 주다니......" 하며 노발대발한 선생은 그들에게 주었던 돈을 도로 빼앗고는 집 밖으로 쫓아버렸다.
34.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총독부의 어용단체인 31본산 주지회에서 선생에게 강연을 청하여 왔다. 선생은 거절했으나 얼굴만이라도 비춰 달라고 하며 하도 간청하므로 마지못해 나갔다. 단상에 오른 선생은 묵묵히 청중을 둘러보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하였으나 청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선생은 "그러면 내가 자문자답을 할 수 밖엔 없군, 제일 더러운 것을 똥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무엇일까요? 라고 말했으나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러면 내가 또 말하지요. 나의 경험으로는 송장 썩는 것이 똥보다 더 더럽더군요. 왜 그러냐 하면 똥 옆에서는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요. 송장 썩는 옆에서는 역하여 차마 먹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청중을 훑어보고 "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하고 한번 더 물었다. 그러면서 선생의 표정은 돌변하였다. 뇌성벽력같이 소리를 치며, "그건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하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35 '庶民子來'라니 어느 날 선생은 홍릉 청량사에서 베푸는 어떤 지기의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였다. 많은 저명인사와 33인 중의 여러분들이 손님 가운데 끼어 있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오고 가다가 "부여 신궁 낙성식이 참 굉장하더군. 과연 庶民子來야."하고 누군가가 한 마디 하였다. 서민자래란, 어진 임금이 있어 집을 짓는데 아들이 아버지 일을 보러 오듯 민중이 스스로 役事를 하러 와서, 하루에 낙성하였다는 <시경 詩經>에 나오는 고사이다.
신궁 낙성식장에 사람이 모인 광경을 비유하여 일제를 찬양하는 한마디였다. 옆자리에서 듣고 있던 선생은 옆 사람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중추원 참의 정병조인데 인사 소개를 하겠다고 하니 선생은 그만두라고 하고는 "정병조야, 이리 오너라."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그도 노하여 나섰다.
"누구냐?" "나 한용운이다. 너 이놈, 양반의 자식으로서 글깨나 배웠다는 놈이 '서민자래'라고 함부로 혀를 놀리느냐. 이놈 개만도 못한 놈!"하고는 앞뒤를 가릴 것도 없이 자리에 있는 재떨이를 냉큼 들어 그의 면상을 향하여 냅다 던졌다. 바로 맞아 그의 면상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놈 어서 가서 너의 애비 남차랑에게 고발해라."하고 큰 소리로 꾸짖고는 즉시 청량사를 나와 버렸다. 당시 일제는 충남 부여를 하나의 성지로 정하여 이른바 부여 신궁을 짓고 있었다. 일본은 백제의 문화가 저의 나라에 건너와서 여러 모로 영향을 끼쳤던 사실을 역이용하여 한민족 말살정책의 한 방편으로 삼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공동운명체라는 이론을 위장하고 있었다. 청량사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바로 이러한 민족적인 울분의 표현이었다.
36. 總督에게 慈悲를 베풀라 31본산 주지회의 때였다. 선생은,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이 몇 번이나 와서 마지못해 나가서 다음과 같은 예기를 하였다.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해마다 새해가 되면 총독 앞에 나가 새배를 하십니다.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 총독의 얼굴을 직접 우러러본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된 일이겠지요.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총독을 찾아가서 얘기를 하십니다."
선생은 잠깐 말을 쉬고 좌중을 훑어본 다음, "그런데 총독은 매우 바쁜 사람입니다. 조선 통치에 관한 온갖 결재를 하다 보면 똥 눌 시간도 없는게 당연지사일겝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스님이 아닙니까. 남의 생각도 해줘야지요. 조선 총독을 좀 편안케 해주시려거든 아예 만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하였다. 이것은 친일 요소가 다분히 있었던 31본산 주지들을 나무란 얘기다. 실로 寸鐵殺人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하겠다.
37. 六堂은 죽었소 육당 최남선이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지은 것은 아는 바와 같다. 그러나 그는 그 뒤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라는 관직을 받고 있었다. 선생은 이것이 못마땅하여 마음으로 이미 절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육당이 길에서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그를 보고도 못 몬 체하고 빨리 걸어갔으나 육당이 따라와 앞을 막아서며 먼저 인사를 청했다. "만해 선생, 오래간만입니다."그러자 선생이 이렇게 물었다. "당신 누구시오?" "나 육당 아닙니까?" 선생은 또 한번 물었다. "육당이 누구시오?" "최남선입니다. 잊으셨습니까?" 그러자 선생은 외면하면서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했소."라고 말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38. 난 그런거 모르오 선생이 불교사에서 재직하고 있던 어느 날, 식산은행에서 선생에게 도장을 갖고 오라는 공한이 왔다. 그러나, 선생은 갈 리가 없었다. 그 후 식산은행 측에서 서류뭉치를 들고 불교사까지 찾아와서 도장을 찍어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선생의 물음은 간단하였다. "선생님, 성북동에 있는 산림 20여만 평을 무상으로 선생님께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선생님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선생은 홱 돌아 앉으며 " 난 그런거 모르오!."하고 거절하였다.
39. 창자까지 陷落되겠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넓은 땅이라 점령한 지역이란 고작 선 과 점에 지나지 않았지만 잇따라 한구 함락, 남경 함락, 상해 함락 등의 보도가 빈번해졌다. 일본의 이러한 정황에 따라서 우리 나라 애국지사들도 사상이 변하여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는가 하면 일제에 아부하고 일본을 위한 강연에 자진하여 나서는 사람이 자꾸 늘어났다. 이 때 선생은 민족정신을 수습할 수 없음을 통탄하며,"왜병의 함락 선전 바람에 창자까지도 함락당하겠군!"하는 밀을 되뇌었다.
40. 감히 개자식이라고 하지 말라 일본이 중국 침략으로 제국주의적 식민 활동에 박차를 가할 무렵이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아부하여 가짜 일본인 되기에 광분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하루는 지기 한 분이 선생을 방문하여 대담히 격분한 어조로 "이런 변이 있소! 최린, 윤치호, 이광수 등이 창씨개명들을 했습니다. 이 개자식들 때문에 민족에 악영향이 클 것이니 청년들을 어떻게 지도한단 말이요!"
이 말을 듣고 난 선생은 크게 실소하고는, "당신이 그 자들을 과신하는 듯하오. 그러나 실언하였오. 만일 개가 이 자리에 있어 능히 말을 한다면 당신에게 크게 항쟁할 것이오.'나는 주인을 알고 충성하는 동물인데 어찌 주인을 모르고 저버리는 인간들에 비하느냐'고 말이요. 그러니, 개보다 못한 자식을 개자식이라고 하면 도리어 개를 모욕하는 것이 되오." 라고 말하였다. 그 지기도 선생의 말이 옳음을 긍정하였다.
41. 乞食은 無能이다. 어느 날 선생은 집 앞에서 탁발하는 중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탁발은 비록 보살만행중의 하나이나, 만행에서 9천9백9십9행을 버리고 하필이면 왜 하나인 탁발을 택했는가? 구걸은 자기의 무능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의 천대를 받을 뿐이다." 이 말을 들은 중은 부처님의 행적을 들어, 선생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자 선생은,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다른 종교인의 멸시를 면치 못할 뿐이니 불교인을 위하여서라도 앞으로 구걸은 하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하고 충고했다. 평범한 한마디 말씀 속에서도 오랜 동안 도습 되어 온 탁발제도에 대한 혁신 정신을 엿볼 수 있다.
42. 더러운 돈 3·1운동 당시 동지였던 최린이 그 후 변절하여 창씨개명을 하고, 어느날 심우장으로 선생을 찾아왔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 안에서 본 선생은 슬그머니 부인을 불러 일렀다. "나가고 없다고 그러오. 꼬락서니조차 보기 싫으니....." 하고 옆방으로 가버렸다. 최린은 마침 선생의 딸 영숙이를 보자, 당시로는 거액인 백원 지폐 한 장을 이 어린이의 손에 쥐어 주고는 돌아갔다. 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는 몹시 화를 내며 부인과 영숙이를 꾸짖었다. 그리고 영숙이가 받았던 돈을 가지고 쏜살같이 명륜동 최린의 집을 찾아가서 그 돈을 문틈으로 던지고 돌아왔다.
43. 일본말엔 따귀로 어느 날 친구 홍재호와 더불어 한가히 잡담을 나누던 중 그가 무심코 일본 말을 한 마디 하였다. 선생은 하던 얘기를 중단하고, "나는 그런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오."하고 말했다. 홍옹은 "선생, 내가 실수를 했구려. 그러나 때가 때인 만큼 안 쓸 수도 없지 않습니까?"하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그의 뺨을 한 대 철썩 때리고는 쫓아버렸다.
44. 그건 글자가 아니다 선생은 외딸 영숙에게 일찍부터 한문을 가르쳤다. 영숙이 역시 아버지를 닮아 머리가 뛰어났다. 다섯 살 때에 이미 <소학>을 읽었던 것이다. 하루는 영숙이가 신문에 섞인 일본 글자를 보고, "아버지, 이건 무엇이어요?"하고 물었다. "음, 그건 몰라도 되는 거야. 그건 글자가 아니야." 비록 어린 딸인 영숙에게 하신 말씀이었지만 이 한마디 말에서도 일생을 독립 운동에 바친 선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45. 威武不能屈 '전 조선인 중 8,9할이 창씨, 경북 안동군이 가장 모범!' 이것은 어느 날, 매일신보에 실렸던 기사였다. 안동군이 가장 일본인이 되기에 급급했다는 이 기사를 본 선생은 "안동은 유림의 양반들이 사는 고장인데 이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학문을 닦았기에 그럴까. 유학이 결코 의지박약한 것이 아닌데 글을 옳게 배우지 못한 까닭으로 그런 꼴이 되었으니 그만 못한 우민이야 말해서 뭣할까? 위무불능굴이란 <맹자>의 구절을 알련마는 모르는 것과 일반이니 참으로 한심하다."하고 탄식했다.
46. 기자의 카메라를 내던지다.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가지가 찾아와 선생에게 학병 출정을 독려하는 글을 부탁하였다. "그런 것 못 쓰겠네, 아니 안 쓰겠네." "그럼 말씀만 해주십시오. 제가 받아 쓰겠습니다." "안돼 그것도 안돼!" 선생의 음성은 다소 거칠어졌다. "정 그러시다면 사인이라도 해주십시오. 원고는 신문사에서 적당히 쓰겠습니다."다그친 독촉과 함께 기자는 카메라를 들었다. 사진까지 찍어다 내려는 심산이었다. 순간, 노한 선생은 기자 손에 들여 있던 카메라를 빼앗아 내던져 버렸다.
47. 春園과 萬海 춘원 이광수는 불교 소설을 쓰거나 소설에 불교에 관한 것을 인용할 때에는 곧잘 선생을 찾곤 했다. 그리하여 그 교리의 옳고 그름을 물었다. 이같이 선생은 춘원과 서로 문학을 논하며 정신적인 교류를 해왔다. 춘원은 창씨 개명을 한 뒤의 어느 날 심우장으로 선생을 방문했다. 집 뜰에 들어서는 춘원을 본 선생은 춘원이 이미 창씨 개명한 것을 알고 있던 바라, 찾아온 인사도 하기 전에 그를 내다보고 노발대발하여 "네 이놈, 보기 싫다.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아라."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춘원은 청천벽력 같은 이 말에 집에 들어가기는커녕 변명할 여지도 없이 무색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48. 日帝는 敗亡한다. "일제의 야망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장차 중국대륙에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칠 곳이다. 그러나 필경 연합군에 항복하고 말 것이다."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선생은 주위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설파하였다. 과연 이 예측대로 일제는 몇 년 뒤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대륙으로 침략해 들어갔으나 결국은 연합군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다. 역사를 통찰하는 혜안이 아니고서는 감히 그때 이런 예측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49. 쌓아둔 것을 보았겠지 선생은 웅변이면서도 좀처럼 농담을 하거나 익살을 부리지 않고 침묵을 지키었다. 그러나 그 방은 유명하며 누구보다도 무게 있었다. 어느 날 장사동에 사는 설태희옹 댁에 명사들이 모였었다.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고하 송진우 선생이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고 호언장담하자, 옆에 있던 선생은 "고하가 보았다는 말은 쌓아둔 것을 보았다는 말이겠지. 라고 넌지시 말했다. 이때 한자리에 있던 위당 정인보는 폭소를 터뜨렸다.
50. 고깔(法帽)를 쓰지 말라 선생은 일본 법관 밑에서 변호사 노릇을 하는 것까지도 불쾌하게 여겼다. 낭산 김준연이 변호사 자격이 있음에도 그것을 단념한 것을 보고 높이 평가했다. "남들은 왜놈 고깔(法帽)를 쓰고 그 밑에서 돈을 벌지만 낭산은 돈이 없으면서고 그 따위 고깔은 쓰지 않으니 신통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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